레베카퍼플

CSS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색상명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navy, orange, green 등의 기본적 색상명 외에도 indigo, aqua, coral과 같이 좀 더 세부적인 색상명도 있고, 약간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crimson, ghostwhite, mintcream 등의 색상명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엔 조금 특이하게 사람 이름으로 시작되는 색상명 rebeccapurple 이 있다. 헥스 코드 #663399 값을 가진 이 보라빛 색상에게 부여된 이름 rebeccapurple 은 2014년 CSS 표준에 포함되어 지금은 모든 주요 웹브라우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색상명이다.

#663399 = rebeccapurple

2014년 6월 21일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 산하의 CSS 워킹그룹은 CSS4 컬러 모듈 업데이트에서 #663399의 색상 값에 ‘rebeccapurple’이라는 색상명을 부여하는 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레베카퍼플은 CSS의 개선과 웹 표준화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인물인 에릭 마이어의 어린 딸 레베카 앨리슨 마이어의 이름에서 차용된 것이다.

에릭 마이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CSS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라면 ‘에릭 마이어의 CSS 초기화 (reset.css)’를 통해 그의 이름을 접해봤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접속하는 웹사이트 중 상당수가 그의 CSS 초기화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 단지 이뿐 아니라 그는 웹 표준화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이를 실현하는데 끊임없이 공헌을 해왔고, 2000년대 초반부터 그가 저술한 책들은 웹 개발 1세대들에게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에릭 마이어의 둘째 딸 레베카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역형성 성상세포종이라는 3급 뇌종양 선고를 받았다. 6주간의 집중적 방사선 치료와 1년에 걸친 화학요법 치료를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5년 내 사망률이 50%에 달하는 절망적인 병이었다. 평소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웹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자주 소통해왔던 에릭 마이어는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레베카의 상태와 투병 과정을 종종 공유하곤 했다. 그리고 에릭 마이어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슬픔에 공감하며 끊임없이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레베카의 상태가 악화될 때는 모두가 함께 슬퍼했고, 상태의 호전이 보이는 날에는 함께 안도하고 격려했다.

하지만 2014년 6월 8일, 레베카는 1년이 채 안 되는 투병 생활 끝에 6살 생일을 맞은 지 12시간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일어날 수 없는 많은 일들

아래 글은 레베카가 세상을 떠난 지 이틀 후 에릭 마이어가 블로그에 올린 ‘So Many Nevers’라는 글의 번역이다.

레베카는 글 읽기를 배워볼 수 없다. 두발자전거를 타는 방법도, 자동차 운전도 배워 볼 수 없다. 최고의 놀이기구를 타볼 수도 없고, 스스로 수영을 해볼 수도, 친구들과 여름 캠프에 가볼 수도 없다. 첫 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어 볼 수도, 스포츠팀에 들어갈 수도, 체육관에서 경쟁을 해볼 수도,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워볼 수도 없다. 사랑에 빠져볼 수도, 이별을 통보해볼 수도, 실연의 경험으로부터 배워볼 수도 없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저녁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 볼 수도, 선생님을 미워해 볼 수도, 고등학교를 졸업해 볼 수도 없다. 첫 피어싱도, 타투도 해볼 수 없다. 언니와 옷을 두고 싸워 볼 수도, 남동생과 비밀을 공유해 볼 수도, 언니와 동생의 눈물을 달래려 어깨를 빌려줄 수도 없다. 독립해서 혼자 살아볼 수도, 반려동물을 입양해 볼 수도, 첫 직장에 실망해 그만둬 볼 수도 없다. 결혼을 해야 할지, 아이를 가져야 할지, 삶 너머의 영적인 존재를 믿어야 할지를 결정해 볼 수도 없다.

영원히 켜질 수 없는 전구와 같은 수많은 발견들, 터져 나올 수 없는 자랑스럽고 빛나는 미소들, 결코 펼쳐질 수 없는 깨달음의 순간들, 레베카가 누려볼 수 없는 수많은 경험들. 레베카가 가질 수 없는 그 모든 시간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 결국 부숴버릴지도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총명한 아이, 나의 작은 불꽃. 네가 자라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네 눈을 통해서 새로워지는 세상을 보고 싶었단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 모든 걸 너에게 돌려주고 싶구나.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삶을 너에게 주어서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보라색을 좋아했던 아이

레베카의 회복을 함께 염원하고 에릭 마이어를 격려했던 웹 커뮤니티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동료의 절망 앞에서 한없는 안타까움과 무력감을 느꼈다. 에릭 마이어의 오랜 동료이자 웹 표준 기술의 또 다른 선구자 중 한 명인 제프리 젤드먼은 레베카의 장례식이 있을 6월 12일에 트위터에 해시태그 #663399Becca와 함께 위로의 메시지를 올리는 것을 제안했다. #663399는 레베카가 가장 좋아했던 보라색을 헥스 값으로 표현한 것이고, Becca는 레베카의 별칭이었다. 장례식 당일, 웹 커뮤니티를 넘어 IT산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트윗이 보랏빛 물결을 이뤘고 #663399Becca는 트렌딩 해시태그가 되었다.

해시태그 캠페인에 이어 W3C의 멤버인 도미닉 하자엘-마슈는 CSS4 컬러 모듈 업데이트에서 ‘rebeccapurple’을 헥스 값 #663399의 색상명으로 지정하는 것을 제안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를 반겼고, 메이저 브라우저 제조사인 모질라,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도 찬성함에 따라 6월 21일 이 제안이 CSS 워킹그룹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에릭 마이어는 웹 커뮤니티의 따뜻한 제스처에 감사를 표했다.

함께 웹을 만드는 사람들

웹의 가장 큰 가치는 그것의 기술적 탁월함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에게 있다. 우리가 매일 같이 사용하는 웹 기술의 표준을 정하는 곳은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거대 기업이 아니라,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이라는 비영리 단체다. 현세대의 가장 강력한 기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수익성보다 접근성을 우선시 할 수 있다는 건 지금과 같은 자본 만능 사회에서 너무나 특별하고 귀한 일이다.

시스템은 그것을 설계한 조직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사실 개별 프레임웍을 제외한 웹 자체의 발전 속도는 다른 기술에 비해 느린 편이다. 하지만 그건 W3C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웹 표준을 정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기술의 최전선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낙오자가 없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웹을 누구나, 어디서든, 신체적 또는 상황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플랫폼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누구보다도 표준의 중립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오랜 공헌자의 절망 앞에서 하나의 예외를 만들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동료의 슬픔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웹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그들은 거대 기업의 실권자도 아니고, 기술 만능주의자도 아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연결한 이 기술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계속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안부를 묻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술적 순수함을 위해 동료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쩌면 레베카퍼플은 웹 커뮤니티가 함께 슬퍼하고 위로했던 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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