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확성기: 디자인 읽기를 권함

  • Author
    이정혜, 이기준, 윤여경, 이지원, 김선미, 강구룡
  • Published year
    2012
  • Category
    Design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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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Highlights

이백년 전까지는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천천히 숙련도를 높이며 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나 매체가 변화하는 속도가 인간이 적응하고 창조하는 속도를 추월하는 느낌이다. 낡은 지식과 재주를 가진 사람은 버려지기 쉬우며, 우후죽순처럼 세부적인 전문 분야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어쩌면 전문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위협받고 있어서, 일시적인 조건 속에서만 전문성이 보장되는 상황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정혜
내가 보기에는 디자이너가 아티스트와 비슷하다는 생각, 자유롭고 창의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이 디자이너들의 삶의 전망을 더 어둡게 한다. 어중간한 지점에 있기는 하지만, 디자이너는 기술자에 더 가깝다. 창조는 디자이너의 전유물이 아니며, 디자이너가 제안할수 있는 창의적인 발상이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도도 아니다. 디자인은 일상을 새로 조직하고 개선할 수 있지만, 일상을 멈추고 구멍을 들여다보게 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디자이너는 자신이 다루는 매체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매체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다. 그 지식은 공유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공동의 자산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매체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는 기획력과 설득력, 감각과 손재주를 갖춘 현대판 장인, 기술자다.
이정혜
디자인에는 혁신 이데올로기가 있다. '진보'나 '개혁', '혁명'이라는 말과 비슷한 듯해도, 꼭 '혁신'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왜 그럴까. 혁신은 사실 경제학에서 유래한 말이다. 정확히 말해서, 슘페터라는 경제학자가 혁신, 즉 이노베이션에 의하여 투자수요나 소비수요가 자극되어 경제에 새로운 호황 국면이 형성되며, 혁신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가장 주도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한데 따른 것이다. 낡은 것을 파괴, 도태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혁을 일으키는 창조적 파괴가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이며,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까지 하였다.
이정혜
'미국에서 인디언 아이들 몇이 전학을 왔다. 마침 시험을 보는 날이라 교사는 아이들에게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내려놓고 시험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시험을 치려는데 전학 온 인디언 아이들의 이상한 행동에 교사는 놀랐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책상을 모아서 동그랗게 마주보고 앉아 있던 것이다. 인디언 아이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교사는 이유를 물었다. "시험을 보려는데 왜 그렇게 앉았니?" 인디언 아이들이 대답했다. "저희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서 해결하라고 배웠어요." … 학교는 성적에 따라 개인별 등급을 나눈다. 1등은 칭찬받고 꼴찌는 핀잔 받는다. 성적은 교실에서만이 아닌 가정으로까지 이어진다. 엄마 친구 아들과 경쟁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학생들은 늘 경쟁 속에 놓여 있다. 학교는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사회를 배우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학교는 이 사회가 경쟁 사회라는 가설을 세우고 경쟁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12년 꽃다운 학창 시절은 이런 세뇌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사회의 현실은 학교와 다르다. 일상의 삶을 가만히 보면 의외로 학교에서처럼 경쟁하지 않는다. 직장 혹은 주변에서 일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 약간의 갈등이 있더라도 경쟁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매일 경쟁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윤여경
과거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현대는 그런 사람을 '패배자'라고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은 한 강연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모임이 동창회라고 말했다. 동창회는 같이 공부했고 같은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서로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동창회에서 가장 성공한 한 사람을 뺀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가 된다. 유독 동창회에서는 친구의 성공이 기쁘지 않다. 그는 동창회에 절대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모든 것을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으로 보면 우리 삶과 노동은 정말 참담해진다.
윤여경
주변을 한번 돌아보자. 주변에 경쟁자가 있는가? 옆에 일하는 동료가 경쟁자인가? 친구가 경쟁자인가? 사용자가 경쟁자인가? 같이 일하는 편집자, 엔지니어 등 디자인에 관련하여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 보자. 그들이 과연 경쟁자인가? 경쟁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관련 업계의 종사자들, 얼굴도 모르는 거리의 사람들이 경쟁자인가? 물론 어떤 상황에 있어서는 경쟁자들이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위에 나열한 모든 사람들을 막연하게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속에서 이들은 경쟁자가 아닌 나의 동료다. 친구이자 선배이자 후배이다. 비슷한 길을, 비슷한 삶을 살면서 서로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다지 우리는 이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도록 강요받았을 뿐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같이한다는 생각으로, 개인의 성공보다는 모두의 성공 쪽으로 목표를 바꿔야 한다. 그리고 태도를 바꿔야 한다.
윤여경
지금 우리의 학교는 친구를 의식하고, 의심한다. 이기기 위해 몰래 공부하고 앞서기 위해 노력한다. 인격보다는 성적으로 칭찬받고 성적이 좋은 학생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선생님보다 친구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회에서는 경쟁자보다 동료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학교와 미디어가 강조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경쟁으로 도배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성적보다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윤여경
'그래, 정말 그렇다! 내가 본 대로 다름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_ 윌리엄 모리스 <에코토피아 뉴스>
윤여경
감히 단언컨대, 디자이너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고 유행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말은 몽땅 헛소립니다. 그런 사기꾼의 말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나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행은 독약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배는 태풍이 오면 여기저기 휩쓸리다가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웬만한 파도에 쓸려 가지 않습니다.
이지원
사업가가 디자인을 효율적인 선전 수단으로 인식한 때는 1900년대 중반 미국의 기업들이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당시 현대주의 예술을 비즈니스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미국의 사업가 어니스트 엘모 컬킨스가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예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보고, 소비의 공학, 의도적 노후화, 스타일로 치장한 제품과 같은 마케팅 수단을 주창했습니다. "광고에 사용되는 이미지와 디자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이미지와 디자인은 내부를 보여 주는 단면도여서는 곤란하다. 광고는 커피에 얹은 거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술을 약게 활용한다면 추하고 멍청하고 진부한 내부를 능히 감출 수 있다." 컬킨스의 방법론은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전혀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75년 전 미국의 사업가가 했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디자이너는 예술과 디자인을 본질로부터 분리한 채 단지 새로운 스타일로 치장하는 데 사용해서 사람들이 불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게끔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저는 요즘 온갖 미디어에서 외쳐 대는 '트렌드'란 말을 들을 때마다 역겨움을 느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렌드, 유행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을 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트렌드란 것은 기업이 어떻게든지 물건과 서비스를 팔아먹기 위해 대규모 자본과 물량 공세를 펼쳐 조작해낸 흐름입니다.
이지원
"디자인은 자본이 주도하는 문화 산업의 일방적인 놀음에 좌지우지 되며 현실을 왜곡하는 한낱 거짓된 활동으로 타락했다. (중략) 우리는 눈먼 자유 속에서 그저 돈을 버는 일에 만족하며 반성과 비평의 신경을 절단한 채 자신을 스스로 속물화시켰다."_어니스트 엘모 컬킨스
이지원
시각디자인이라는 분야는 지금까지 미술대학의 일부로 인식돼 왔다. 심지어 요즘 늘어난 독립적인 디자인 대학도 쉽게 미술대학으로 분류된다. 사회 전반의 인식은 '디자인 ∈ 미술' 이라는 공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간단히 말해 이 사회에서 디자인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미술 이상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디자인과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디자인의 격차가 심하다.
이지원
'책에는 이미 그려진 길에 대한 과정이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책을 통해 그 길들을 미리 관찰하는건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함이지요. 어떤 길이 만들어졌나, 어떤 생각 체계가 구축되어 있나를 관찰한 후 그 길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읽기는 무척 중요합니다. 디자인 작업물들도 마찬가지에요. 그 과정들을 답습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면밀히 관찰한 후 그것과 겹치지 않게,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내 세계를, 내 작품을 구축하는 것이지요.'_일카 수파넨(핀란드 디자이너)
김선미
'선입견을 꼭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그것을 1차적 인식이라고 정의한다면, 자신의 선입견이 사회 구성원들의 선입견과 연결될 경우 오히려 소통이나 공감의 도구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실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그 선입견이 오히려 중요한 코드가 되기도 하지. 빨간색을 무기력한 느낌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처럼. 물론 그것이 전형성이나 고정관념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 선입견을 다른 선입견으로 깨는 과정들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시작되는 거 아닐까.' 선입견은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선입견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닫힌 구조로 인해 위험해 지는 것이었다.
김선미
소설은 허구적인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만들어 내는 머릿속의 이미지와 형태는 디자인보다 자유롭고 선명할 때가 있다. 글자라는 최소한의 약속된 기호로 보는 이의 경험에서 최대한의 상상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의 이해'에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카툰에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이입시킨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글자라는 단순한 비주얼은 가장 많은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강구룡
'모든 가능성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은 자동차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금형, 도구, 주형들은 3년만 쓰면 낡아 빠진다. 이 때문에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스타일 주기를 위한 시간표를 만들었다. 개조하고 리디자인된 금형 때문에 작은 외관상의 변화가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며, 주요한 스타일 변화는 3년마다 한 번씩 이루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부터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미국 대중들에게 적어도 3년마다 자동차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라는 개념을 팔았다.'_빅터파파넥 <인간을 위한 디자인>
'우리의 일상생활만 보아도 쓰레기라는 것이 고정된 범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꼭 쓰레기장에 있는 것을 주워서 다시 쓰는 경우가 아니라도, 사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쓰레기냐 아니냐의 경계를 넘나든다.'_수전 스트레서 <낭비와 욕망: 쓰레기의 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