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은 정답이 아니다

  • Author
    Donald A. Norman
  • Published year
    2012
  • Category
    Design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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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87기 조종실은 비행기 엔지니어나 디자이너들이 일부러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의도된 복잡함이다. 비행기를 안전하게 조종하고, 항로를 정확하게 찾고, 승객들에게 편안한 비행을 제공하고, 시간을 지키고,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재난에 대처하려면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항공기 조종실은 복잡해야 한다. 대신 혼란스러워서는 안된다.
현대 기술의 혼란스러움에서 비롯된 좌절을 줄이기 위한 많은 시도는 상당 부분 핵심을 빗겨갔다. 단순한 상황을 고려한 심플한 제품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겐 복잡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 게임, 책 모두 다양하고 풍성하길 바란다. 결국 우리는 단순함을 갈구하는 동시에 복잡함을 필요로 한다.
단순함과 복잡함의 차이는 구조에 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단순한 것보다는 적절한 복잡함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너무 단순하면 지루하고, 너무 복잡하면 혼란스럽다. 저마다 각기다른 이상적인 복잡함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기준은 비용이 될 수도,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기준을 선택할 것인가는 그 방식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중요성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적합하게 복잡하다면 그것을 이해하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불필요하게 꼬여 있고, 혼란스럽고, 체계적인 구조가 없는 기술이나 서비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불평할 필요가 있다.
표시는 기술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복잡함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지속적인 표시를 통해 어떻게 작동되는지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적합하게 행동하거나 특정 행위를 취할 것을 호소한다. 그렇지만 표시는 나쁜 디자인의 신호이기도 하다. 표시를 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안된다. 이상적인 세상은 디자이너와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한 치의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표시를 통해 이해의 부족함을 채운다.
인간의 행위는 믿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사회적 행동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디자인해야 한다. 사람들은 제품이 눈에 잘 보이고, 부드러운 넛지, 기표, 기능 강제, 피드백을 제공할 때 더 적합하게 행동한다.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반드시 이용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생각해야 한다.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기능을 훼손하지 않고, 비용을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적합한 사용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긴장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도전과제다.
기능설계(functional design)는 제품의 성능을 생각해 필요한 크기,형태 등을 설계하는 디자인의 한 부분이다. 사용자가 제품을 쉽게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저한 기능 설계가 필요하다. 이때는 사용자와의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 및 문화 등을 이해하고 이를 적용해야 한다. 적합한 기능 설계를 거친 제품은 사용자의 지식에 의존하거나 실험해보지 않아도 편리하고 즐겁게 사용할 수 있다.
개념적 모형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다. 때문에 사물이 실제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과정인 '멘탈 모델'이라고도 부른다. 개념적 모형은 물리적이고 복잡한 실제 상태를 머릿속에서 작업 가능하고 이해하기 쉬운 지적 개념으로 바꿔준다.
무언가를 간단하게, 아니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다이얼이나 조작방식, 다양한 기능들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물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얼마나 적확하고 체계적인 개념적 모형을 가졌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단순함이란 어떤 의미일까? 좋아하는 기능은 모두 들어가 있으면서 버튼 하나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단순함'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애플의 부사장이 된 래리 테슬러는 몇 년 전 "시스템의 전체적인 복잡도는 항상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 이 주장은 오늘날 '테슬러의 복잡함 보존의 법칙'으로 알려졌다. "모든 프로그램에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잡한 정도, 즉 복잡함의 하한선이 존재한다. 이때 던져야 할 질문은 이 복잡함을 누가 감당하느냐는 것이다. 사용자인가, 아니면 개발자인가?"
버튼이 100개가 넘는 TV 리모컨보다 몇 개의 버튼만 있는 리모컨이 더 좋아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플해 보이는 리모컨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정해진 기준도 없이 계속해서 버튼을 눌러야 한다면 결코 간단하다고 말할 수 없다. 보기에는 복잡해 보여도 각각의 버튼이 고유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면 초보자라도 적합한 버튼을 찾아 한 번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심플함과 단순한 외관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디자인이 간단하다고 사용까지 쉬운것은 아니다.
단순함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이해의 정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제품의 기능이나 옵션, 그리고 외형이 사람들의 개념적 모형과 맞을 때 그것은 단순하게 느껴진다.
"다른 조건이 모두 동등하다면 가장 단순한 것이 제일 좋다" - 오컴 "사물은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더 단순해지면 안된다" - 아인슈타인
누구나 단순함을 원한다. 하지만 그 요구는 핵심을 빗겨갔다. 단순함은 목표가 아니다. 기술의 힘과 유연함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주차장 문을 열어주는 하나의 버튼은 간단할지 모르지만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휴대폰에 버튼이 하나만 있다면 틀림없이 단순해 보이겠지만 아마 전원을 켜고 끄는 것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전화를 걸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아노에 건반에 88개, 페달이 3개 있어서 너무 복잡한가? 사실 음악에서 그 건반을 다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건반과 페달의 수를 줄여야 할까? 이처럼 단순함에 대한 맹목적인 요구는 핵심을 빗겨간다.
단순함은 복잡함의 반대가 아니다. 복잡함은 세상의 모습이고, 단순함은 마음의 상태다. ... 제품을 이해하는데 쓰이는 본질적인 복잡함은 포기하면 안 된다. 때로는 복잡함도 필요하다. 우리의 과제는 복잡함이 혼란스러움이 되지 않도록 복잡함을 다스리는 것이다.
기계는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작동해야 한다.
기술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입하면서 간섭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아주 간단한 작업조차 복잡해지고, 실수가 증가하며, 효율성이 떨어진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혼란도 가중된다.
복잡함을 부르는 또 다른 문제는 사용 패턴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간단하고 아름다운 것도 혼란스럽고 추하게 만든다.
영국에서 조경 사업을 하는 필립 모이스의 블로그 '랜드스케이프 주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마도 보도는 희망선에 따라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퉁명스러운 관료주의와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어떤 도시 계획가들은 미적으로 완벽한 레이아웃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분개한다. 어떤 성난 설계자는 사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길 대신 가깝게만 가려고 하는 심하게 게으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이것을 도시의 오점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는 맞춰주지 말자고 한다. 장애물을 설치해서라도 그들이 억지로 따르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선 경로를 만들 필요가 있다. 아니면 보행자가 의도된 길만 이용할 수 있도록 쉽게 침범할 수 없는 방해물을 설치한다.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방해물로 울타리, 나무, 연못 같은 것이 있다. 가장자리, 또는 식물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화분도 그런 조치의 하나다.'
사람들은 빠르고 쉬운 길을 찾아 잔디나 화단을 가로지른다. 빌딩 입주자들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에 도화지나 신문, 포스터 등을 붙이기도 한다. 벽이나 캠퍼스의 길을 따라 포스터, 간판, 공지문이 덕지덕지 붙는다. 맞다. 이런 행동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고상함을 파괴한다. 이때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행동에 짜증을 부리기전에 이런 반응을 유도한 자신의 사회성 부족을 반성해야 한다.
희망선은 게으름의 표시인가? 물론이다. 하지만 게으름은 '에너지 최소화'라고 부르는 물리학의 기본법칙이다. 모든 물리적인 시스템은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상태를 지향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예술이 아닌 이상 공공장소는 사람을 위한 곳이다. 인간중심 디자인과 사회적 디자인에는 그 사물을 이용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고려해 그들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희망선은 바람직한 행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표다. 현명한 기획자와 디자이너라면 이 기표에 주의를 기울이고 적합하게 대응해야 한다. 사용이 간단한 사물을 만드는 비교적 편한 방법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동하면서 남긴 자국을 시스템에 이용하는 것이다.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사람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그 비전에 적합한 행동을 밀어붙여야 할 순간이 있다. 논의를 불러일으킬 목적의 예술작품이 그렇다. 안전하지 않거나, 위험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을 막아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에는 '부적합한 행동'을 막기 위해 장애물을 설치할 만하다. ...희망선은 진정한 선호도를 보여주지만 선호하는 모든 것을 반영해서는 안 된다.
우리 행동이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에 남긴 발자취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기표는 우리 삶에 중요한 보완제다.
자동차와 컴퓨터 시스템은 시간이 갈수록 복잡해진다. 하지만 복잡함은 시스템 내부에 숨어있다. 덕분에 운전자는 간단하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 이는 테슬러의 '복잡함 보존의 법칙'이 적용된 또 다른 경우다.
한때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스타일, 패션, 인테리어와 같이 외관을 가리켰던 적이 있었다. 제품은 사진에 담겼고 가치도 겉모습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디자인 업계는 기본적인 니즈를 충족시키고 긍정적이고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는 기능과 작동방식을 고민한다. 그리고 좋은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좋은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합한 커뮤니케이션이 디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자인에 대한 나의 원칙 중 하나는 오류 메시지를 없애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이란 절대로 '그건 잘못됐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재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때 등장하는 오류 메시지는 시스템이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표는 적합한 행동을 알려주는 인지 가능한 신호다. 의도적인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기표는 디자이너들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하도록 해주고, 디자이너나 그 디자인을 이용하는 사람 모두가 편리하게 여기는 강력한 도구다.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핵심 문제에 대한 개념을 새로 세우는 것이다.
복잡함을 다룰 때 기억해야 할 점은 자동화는 우리 모두를 편하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효과적이고 믿을만한 시스템에 의해 모든 작동이 완벽하게 자동화되었을 때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를 대비해 문제를 해결할 다양한 방식의 설계가 필요하다.
'옵트인'은 당사자의 사전동의를 얻어야 e메일을 발송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옵트아웃'은 당사자가 발송인에게 수신거부 의사를 밝혀야만 e메일 발송이 안되는 방식이다.
좋은 매뉴얼보다 더 필요한 것은 매뉴얼이 필요 없는 시스템이다.
디자인적 사고란 가장 먼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두고 "클라이언트가 해결해달라고 하는 문제는 절대로 해결하지 마라"고 바꾸어 말한다. 클라이언트는 증상에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면서 디자이너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깔려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문제가 정말로 해결되어야 하는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근본원인 찾기'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애플이 2001년에 소개한 아이팟이 뛰어난 디자인 때문에 시장을 잠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이팟이 뛰어난 제품인 것은 맞지만, 애플의 성공비결은 아니다. 비밀은 역설적이게도 디자인이 제품 성공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애플은 음악을 찾고, 사고, 다운받고, 플레이하고, 법적인 이슈를 극복하려는 전체 시스템을 단순화했다.
좋은 시스템 디자인은 전체 과정을 인간중심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단순함은 이상일 뿐이고, 실용성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 넷플릭스
서비스는 복잡하다. 하지만 서비스는 사람을 돕는 분야다. 게다가 사람으로 구성된 업무다. 현대화와 생산성 향상의 바람 속에서 우리는 인간경험의 가치를 쉽게 간과한다. 중요변수를 측정함으로써 우리는 약점과 변화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제품과 서비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혼란스러움을 줄여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확신이다. 그들은 심지어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설명에도 안심한다. 관계자들이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고, 이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은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와 확신을 줌으로써 불확실성을 줄여야 한다.
고객이 실제로 줄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나중에 그 상황을 떠올리는 순간에 '기다림'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 ...기억은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은 디자인의 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