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머니 비트코인

  • Author
    김진화
  • Published year
    2013
  • Category
    Finance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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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Highlights

베를린의 한 술집 출입구에 내건 안내판에는 꽤나 인상적인 글귀가 쓰여 있다. “나는 정직한 돈만 믿는다. 금과 은 그리고 비트코인.(I believe in Honest Money. Gold, Silver and Bitcoin.)”
비트코인에 담겨 있는 기술적 성취의 상당 부분은 바로 어떤 권력 기관이나 신용을 담보하는 기관의 개입 없이도 쉽고 안전하게 화폐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들이다.
기존 화폐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중앙은행이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가 화폐의 역사는 이 믿음을 저버리는 사례들로 충만하다. 은행 또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맡긴 돈을 잘 보관하고 전자적으로 잘 전달할 것이라는 신뢰. 하지만 은행들은 그 돈을 신용 버블이라는 흐름 속에서 (함부로) 대출했다.
비트코인의 이런 저력은 과학기술이라는 든든한 토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암호화 기술을 기반으로 비트코인 프로토콜을 설계했으며 수학적 알고리즘이 그 핵심이 되도록 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른 것은 정부가 다 탄압할 수 있어도 “수학은 죽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리버테리언은 개인적 자유를 사회의 기본 구성 원리로 삼는 정치철학이다. 정부 권한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정치적 자유는 극대화하기를 원한다. 정책적으로는 규제가 완화된 자유방임 시장, 자유무역주의, 이민 규제 완화 등을 추구한다.
스위스 디나르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용되던 이라크 공식 화폐였다. ‘스위스’가 붙는 이유는 단지 그것을 찍어 내는 인쇄판이 스위스제였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이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이라크 대통령은 스위스 디나르를 폐지하고 새로운 화폐 ‘사담 디나르’를 공식 화폐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 새 화폐를 마구 찍어 대기 시작했다. 전후 복구와 위태로워진 독재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던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자치 지구에서는 이 새로운 화폐를 거부했다. 무분별한 발행으로 갈수록 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대신 스위스 디나르를 계속 사용했다. 사담 디나르와 달리 새로 찍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스위스 디나르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오르는 화폐가 되었다.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국가와 법률의 강제성을 수반하지 않는 이 화폐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의 결과로 다국적 연합군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했을 때야 비로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폐지되기 직전 사담 디나르와 스위스 디나르의 환율은 무려 300대 1에 이르렀고 쿠르드족뿐 아니라 이라크인 대부분이 스위스 디나르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국가와 법률의 보증 없이 생명력을 유지했던 스위스 디나르의 존재는 돈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돈의 기능적 정의는 다음과 같은 세 항목으로 이뤄진다. • 교환의 매개 수단 돈이 등장하면서 물물 교환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이 되었고 교환이 활성화되었다. • 가치 산정의 단위 교환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가격을 매겨야 하는데 화폐가 그 공통 단위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용이해졌다. • 부의 저장 수단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가치가 안정적으로 저장되고 전달될 수 있게 되었다.
• 희소성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면 누가 애써 일하겠는가. • 대체 가능성과 통일성 똑같은 모양과 형상을 지닌 것들로 계속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 이동성 표상하는 가치(액면가) 대비 무게가 가벼워야 가지고 다니기에 편하다. • 구별성 쉽게 진위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 내구성 쉽게 변하거나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 1세대 화폐 상품 기반의 ‘금’ • 2세대 화폐 정치 기반의 ‘달러’ • 3세대 화폐 수학 기반의 ‘비트코인’"
철학자 고병권은 그의 저서 『화폐, 마법의 사중주』(2005)에서 화폐를 사물이 아닌 ‘관계’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근대 사회에서 화폐는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배치’ 그 자체로 존재하고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을 구성한 힘의 핵심에 화폐 제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진정한 주체가 된다. 이제 개인과 개인의 연결은 공동체가 아니라 화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자신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단지 화폐의 생산이 목적이며 화폐를 통해서만 사회적 관계 맺음이 이루어진다.
화폐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인간이 화폐 권력의 노예가 되는 사태는 어떻게 벌어지는가? 정답은 ‘축적’에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적으로 돈은 교환에 수반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 그것을 활성화하는 매개 수단이었다. 이처럼 사람들 네트워크에서 오가는 거래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돈이 축적의 대상이자 목적이 되는 순간 돈과 인간의 관계는 역전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경제 활동은 삶의 질 향상이나 행복 추구가 아니라 자본의 축적을 목표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엔데는 화폐와 금융 시스템이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스위스 경제학자 루트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지폐가 그 지방에 도입되기 전에는 좋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기잡이 성과는 날마다 달라도 어쨌든 물고기를 잡아 집이나 이웃 사람들의 식탁에 올릴 수는 있었다. 매일 팔 수 있는 만큼만 잡은 것이다. 그랬는데 지금은 바이칼 호에서 이른바 마지막 한 마리까지 다 잡아 버렸다. 그 이유는 어느 날 지폐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은행의 대부도 이루어졌다. 어부들은 물론 대부금으로 큰 배를 샀고 효율이 더 좋은 어로 기술을 채용했다. 냉동 창고가 세워지고, 잡은 물고기를 더 멀리까지 운반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대안(對岸)의 어부들도 경쟁적으로 큰 배를 사고, 더욱 효율 좋은 어로 기술을 사용해 물고기를 빨리, 많이 잡는 데 열심이었다. 대부금과 이자를 상환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오늘날에는 호수의 물고기 씨가 말라 버렸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방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수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상태가 되어도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근대 경제, 그중에서도 화폐 경제가 자연 자원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엔데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 보자. 화폐를 실제의 노동이나 물적 가치의 등가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지금의 화폐 시스템에서 무엇을 바꿔야 할까? 이는 인류가 이 행성에서 앞으로도 생존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엔데가 살아 있다면 비트코인으로 촉발된 가상 화폐라는 흐름을 긍정적으로 봤을까? 비트코인은 화폐(구조)를 넘는 화폐가 될 수 있을까?
규제 법안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사용을 금지시킨 (유일한 국가인) 태국 정부를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멈추라고 명령한’ 크누트 1세에 비유한 영국 보수당 의원 더글러스 카스웰(Douglas Carswell)의 지적처럼, 한국 사회와 규제 당국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이 책이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