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 Author
    John Stuart Mill
  • Published year
    1859
  • Category
    Philosophy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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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Highlights

진리의 일부만을 가지고 진리 전체라고 주장함은 잘못이며, 도리어 서로 대립하는 사상이 서로의 한계를 지적하고 질의 응답할 때 진리 전체를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유능하고 능률적인 관료 집단, 특히 진보를 추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채택할 능력이 있는 집단을 영구히 갖기를 원한다면, 또 만일 우리가 우리의 관료제를 공리공론의 정치로 타락시키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인류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여러 능력을 형성하고 배양하는 모든 사업을 관료 집단이 독점하게 해서는 안 된다.
공중은 국가가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리라는 기대에 젖어, 또는 최소한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과 심지어 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모든 해악을 당연히 국가 책임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 해악이 그들의 인내 한계를 넘어서면 그들은 국가에 대항해 궐기하여 이른바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다른 어떤 사람이 국민의 정당한 승인을 받아, 또는 그런 승인 없이, 홀연히 권좌에 앉아서 관료 집단에게 명령을 내리면, 모든 것은 종래와 거의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이는 관료제가 종전과 다름없이 거의 그대로고, 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래 제한이나 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에 대한 제한은 물론 속박이다. 그리고 모든 속박은 그것이 속박인 한 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속박이란, 인간 행동 중 사회가 당연히 속박할 권한을 갖는 부분에만 관련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속박은 오로지 그 속박에 의해 이루려고 한 결과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에만 잘못된 것이 된다.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개인의 정신적 발달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뒤로 돌리고, 세부의 사소한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기능, 또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 국가, 또한 국민을 위축시켜 국가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는 머지않아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또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밀은 “국가가 개인이나 단체에게 활동과 능력을 촉구하기보다 도리어 그것을 자신의 활동으로 대체하고자 할 때”나 “정보와 조언을 제공하지 않고 필요에 따른 비난도 하지 않은 채, 국가가 개인에게 억압적으로 일을 시키거나 그들을 제쳐놓고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일을 할 때” 해악이 생긴다면서, 국가의 간섭은 당연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체적 국가 교육은 오직 국민을 틀에 집어넣어 서로 너무나 흡사하게 만들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국가가 국민을 정형화하는 틀은,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우월한 세력(군주건, 승려계급이건, 귀족계급이건, 현재 대중의 다수파이건)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교육이 효과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국민의 정신에 대한 압제가 확립되며, 그 압제는 자연의 추세로서 국민의 육체에 대한 압제를 유발한다.
사회에 대한 어떤 특별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자신 이외의 특정 개인에게 명백한 침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 행동에 의해, 어떤 사람이 사회에 미치게 되는 오로지 우발적이거나 추정적인 손해의 경우, 그것에서 발생하는 불편은 인류의 자유라고 하는 더욱 큰 이익을 위해 사회가 충분히 참을 수 있는 불편이다.
하나의 인민은, 일정 기간 진보적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정지한다. 언제 정지하는가? 그것은 개성을 갖지 못할 때다.
개량의 확실하고도 영속적인 유일한 근거는 자유다. 이는 자유가 있으면 개인의 수와 같은 정도로 많은 수의 개량이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여론의 추세에는 하나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개성이 너무 뚜렷이 표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인은 지성이 평범할 뿐 아니라, 성향도 평범하다. 그들은 스스로 어떤 이례적인 일을 시도할 정도의 강력한 취향도, 의향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러한 취향과 의향을 갖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 그런 사람들을 모두 자신이 멸시하는 야비하고 무절제한 사람들과 같다고 간주한다.
타인을 강제하여 그 길을 따르도록 하는 권력은,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와 발달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강자도 타락하게 만든다.
현대에 개인은 군중 속에 매몰되어 있다.
천재적인 인물은 언제나 극소수다. 언제나 그렇다. 그러나 그들을 확보하려면 그들이 자라날 토양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천재는 오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 천재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개인적이다.
타인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사항을 단순히 타인의 불쾌감을 이유로 속박하게 되면, 가치 있는 그 무엇도 발달시키지 못하고, 오로지 속박에 대한 저항에서 나오는 힘을 발달시킬 뿐이다. 만일 이에 순종한다면 인간 본성 전체가 쓸모없게 된다. 각자의 본성을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다양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가 좋아하는 대로 생활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본성이란, 어떤 틀에 따라 만들어져, 미리 정해진 일을 정확하게 하게 되어 있는 기계가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불어넣는 여러 내면적 힘의 경향에 따라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려고 하는 나무다.
지각, 판단력, 식별력, 정신적 활동, 심지어 도덕적 선호라는 인간의 여러 능력은, 오로지 그것을 선택하는 경우에만 작용하게 된다. 무엇을 하든, 그것이 관습이기 때문에 한다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여론은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정직하게 논의함과 동시에, 반대파에게 불리하게 될 과장을 전혀 하지 않고, 반대파에게 유리하거나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은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그에게 상당한 명예를 부여해야 한다.
어떤 주제에 대한 일반적이거나 우세한 의견이라고 해도 그 전부가 진리인 경우는 드물거나 전무하기 때문에, 그 나머지 진리가 보충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의 충돌에 의해서만 기대될 수 있다.
이러한 의견 충돌이 유익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열렬한 종파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침착하고 공정한 방관자에 대해서다. 가공할 만한 폐해는, 진리의 어떤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일부를 침묵으로 억압하는 경우에 생긴다. 그러나 인민이 양쪽 의견을 듣게 되면 언제나 희망이 있다. 반면 오류가 편견으로 굳어지고, 진리가 허위로 과장되어 진리로서 효과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어느 한쪽에만 귀를 기울이는 경우다.
이른바 기독교 도덕은 모든 반동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대체로 이교도 신앙에 대한 반항이다. 그 이상은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고,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다. 또한 고상한 것이 아니라 결백한 것이고, 용감하게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유혹에 대한 자제다. 그 훈계(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에서는, ‘무엇을 하지 마라’는 것이 ‘무엇을 하라’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기독교 도덕은 육욕을 두려워한 나머지 금욕주의라는 우상을 만들었고, 그것이 점차 왜곡되어 계율을 우상화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희망과 지옥에 대한 공포를 도덕적인 생활로 이끄는 하나의 적절한 동기로 내세우는데, 이 점에서 그것은 고대인의 최선의 도덕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기적인 동기에 유혹되어 동포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각자의 의무 감정을 그 동포들의 이해관계에서 분리해, 인간 도덕에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특징을 부여하고자 노력한다.
인생의 중대한 실제 문제에서, 진리는 대체로 서로 대립하는 것의 조정과 결합 문제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정확하게 그러한 조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포용력이 있는 공정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조정은 결국 서로 적대적인 깃발 아래 싸우는 투사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하는 거친 방법으로 이룩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귀족주의, 사유재산과 평등, 협동과 경쟁, 사치와 금욕, 사회성과 개별성, 자유와 규율, 기타 실제 생활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대립적 존재 모두, 그 각각에 가담하는 의견이 평등한 자유로 발표되고, 평등한 재능과 활기에 의해 강조되며 옹호되지 않는 한, 쌍방의 요소가 공정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계속 생겨날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중지함은 의견의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통일은 진실한 의견의 경우에는 유익하나, 그 의견이 잘못된 경우에는 위험하고 유해하다.
어떤 사물에 대해 이미 의문이 없어지게 되면, 그것에 대해 더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 인류의 파멸적인 경향이야말로, 인류가 저지르는 오류의 절반을 낳게 하는 원인이다. 현대의 어느 저자가 “이미 결정된 견해는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우리가 가끔 모든 신조의 지도자들에게서 듣는 탄식은, 신자들이 형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신자들의 마음속에 심고, 그 생생한 이해를 그들의 감정에 침투시켜 그들 행동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 점이다.
자신과 중대한 관련이 있는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갖는 것만큼 지성과 판단력 연마에 도움이 되고 따라서 인류의 지성과 판단력 개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겠는가?
토론 없는 진리란 독단이다.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 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정통파의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 모든 탐구를 금지함으로써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이단자 쪽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로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이단자가 아닌 사람들, 즉 이단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지적인 발달이 전적으로 위축되어 그들의 이성이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다.
가장 적극적이고 탐구심으로 가득한 지성인 대부분이, 스스로 확신하는 일반 원리와 원칙을 오직 자기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일반에 대해서는 내심 배척하는 전제에 대해 자신의 결론을 가능한 맞추어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에서는, 한때 지적인 세계를 수놓은 저 개방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지성인들, 논리적이고 언행이 일치하는 지성인들이 배출될 수 없다.
진리에는, 오직 진리로서 어떤 오류에도 굴복하지 않는 고유의 힘, 즉 감옥과 화형에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부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하다.
박해는 이교異敎 집단이 매우 강력해서 박해가 효과적으로 행해질 수 없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성공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보호 하에 로마제국의 종교로 채택되었다면 세계의 기독교가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생각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어떤 세대 사람들이 후대 사람들의 경악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서 우리는 법이라는 무기가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고귀한 견해를 뿌리 뽑기 위해 사용되어왔다는, 역사적으로 기억할 만한 여러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어떤 문제의 전체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들의 의견을 되도록이면 많이 듣고, 여러 종류의 성격 소유자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을 연구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되면 될수록, ‘세상’의 무오류라는 것에 맹목적인 신뢰감을 갖고 의지하려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에게 ‘세상’이란 스스로 접촉하는 일부 세상, 즉 그의 정당, 그의 종파, 그의 교회, 그의 사회적 계급을 뜻한다.
누구나 자신이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자신이 굳게 믿는 의견이 그러한 오류의 하나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론·출판의 자유Liberty of press’라는 것을, 부패하거나 압제적인 정치에 대한 보장의 하나로 필요한 것이라고 변호해야 할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를 나는 희망한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류에게는 지배자로서든 동포 시민으로서든, 자신의 의견이나 버릇을 행동의 준칙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최선의 감정 일부와 최악의 감정 일부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어서 권력의 폐지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억제될 수 없다. 그런데 권력이란 쇠퇴하기는커녕 도리어 증대되므로 그 폐해에 맞서서 도덕적 신념이라는 강력한 장벽을 구축할 수 없는 한, 우리는 그 폐해가 증대하리라고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여론의 힘과 심지어 법의 힘으로 사회의 권력을 개인에게 부당하게 신장시키려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경향이 사회를 강화하고 개인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는 이상, 그 침범은 자동적으로 소멸될 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반대로 더욱더 가공할 만한 것으로 성장할 악 가운데 하나다.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을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이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고대 국가는, 국가가 구성원 각자의 육체적·정신적인 훈련 전반에 깊은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이유에서, 공적 권위가 모든 개인적 행동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는다고 생각했고, 고대 철학자들도 이에 찬성했다. 이러한 사고는, 강력한 적국에 둘러싸여 외부 공격이나 내부 폭동에 전복될 위험에 항상 처해 있고, 따라서 긴장과 자제가 단기간에 풀리게 되면 너무나도 쉽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해, 자유의 유익한 항구적 효과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작은 공화국에서는 용인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개인의 행동 중에 사회의 제재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은, 그것이 타인과 관련되는 경우뿐이다.
문명사회의 어느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타인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경우뿐이다.
이처럼 사회의 선호와 혐오가, 또는 그 유력한 일부의 선호와 혐오가, 법과 여론의 제재에 의해 일반인이 준수해야 할 규범을 실제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인간 행동의 규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형성하는 실제적인 원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 즉 모든 사람은, 자신과 그가 공감하는 사람들이 타인들에게 행동하도록 원하는 행동을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하는 감정이다.
관습이란 제2의 천성일 뿐만 아니라, 항상 제1의 천성으로 오해된다. 인류가 서로에게 부과하는 행동 규범에 대해 갖는 불안한 감정을 방지하는 데 관습의 효과는 더욱더 완벽하다. 왜냐하면 관습이란 문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또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 이유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성질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정적으로 되고, 나아가 이성이 불필요하다고 믿는 데 익숙하며, 철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믿도록 조장되어왔다.
학자가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지 않는 것은 사고의 심오함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자신의 지위를 걱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