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Author
    Alain de Botton
  • Published year
    2012
  • Category
    Essay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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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Highlights

이 거대한 식량 창고는, 적어도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이 수천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다음 끼니를 어디서 찾아먹을까 안달하는 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동물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 결과 우리는 황제펭귄과 아라비아의 오릭스라면 지금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시달리고 있는, 절실하기 짝이 없는 먹이 걱정에서 벗어나, 스웨덴어를 배우거나 미적분을 익히거나 우리 관계의 진정성을 걱정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얻게 되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신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기능들을 단순화하거나 가속화하는 데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밀가루 반죽으로 심리적 갈망에 응답을 하겠다는 계획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로렌스는 그런 계획이 노련한 브랜딩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면 비스킷의 폭, 형태, 코팅, 포장, 이름 등으로 구체화되며, 이런 결정에 따라 비스킷도 위대한 소설의 주인공처럼 상황에 어울리는 미묘한 느낌을 발산하는 인격을 부여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전문화된 분야와 더불어 수많은 수수께끼 같은 직책들이 등장한다. 포장 기술자, 브랜딩 담당 임원, 학습 센터 관리자, 전략 기획 평가자. 이 사람들은 헌신적이고 심도 있게 경력의 고랑을 일구며 앞으로 나아간다.
세밀하게 나누어놓은 분업은 감탄할 만한 수준의 생산성을 낳았다. 이 회사의 성공은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제시한 능률의 원리들을 그대로 증명하는 듯하다. 파레토는 전체적인 일반지식 대신 정밀하게 제한된 분야에서 개별적인 능력을 육성하는 구성원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사회의 부도 늘어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파레토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경제에서는 일이 점점 미세하게 세분화되면서 복잡한 기능의 축적이 가능해지고, 이것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매매될 수 있다. 의사는 보일러 고치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기관차 운전사는 아이들 옷을 꿰매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비스킷 포장 기술자는 창고 보관 문제를 공급망 관리 전문가에게 넘기고 자신의 에너지는 롤 포장 메커니즘 개선에 쏟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이런 완벽한 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전문화되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지역 영업 관리자나 건물 서비스 엔지니어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의미심장하다. 아이들 책에는 보통 가게 주인, 건설 노동자, 요리사, 농부가 등장한다. 인류의 생활을 눈에 띄게 개선하는 일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신 상태에서도 안전한 출세길을 버리고 말라위 시골 마을에 먹을 물을 공급하는 일을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또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면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고급 비스킷보다도 섬세하게 통제되는 제세동기가 낫다는 것을 알기에, 소비재를 생산하는 일을 그만두고 심장 간호사 일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그 직원들에게 숭고한 이상을 제시하는가, 그래서 직원들이 그 이상을 위하여 온 힘을 쏟고 자기 삶의 가장 큰 부분을 내어놓는가.
제조업자는 자신의 일이 인류에게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경박한 방식을 보면 그 주장은 빛이 약간 바랜다. 한 직원이 ‘핌블스’라고 부르는 만화 캐릭터들이 인쇄된 공짜 스티커 증정 행사를 골자로 한 슈퍼마켓 프로모션을 고안하는 데 3개월을 보냈다는 소식에 대한 합리적 반응은 슬픔뿐이다.
이 사회는 우리의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요구와 관계가 없는 산업, 수단의 진지함과 목적의 하찮음 사이의 괴리를 피하기 어려운 산업, 그 결과 컴퓨터 터미널 앞과 창고 안에서 우리를 의미 상실의 위기로 몰아넣기 십상인 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 아무리 강력하고 우리 회사들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현대의 일하는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결국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정신의 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일을 중심에 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어떤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다.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도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길로 나아가려면 보수를 받는 일자리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런 태도는 그 이후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그리스 철학자에게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기형을 낳는다고 보았다.
‘소명’이라는 이 묘하고 불행한 용어는 중세에 기독교의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소명이란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하라는 명령과 갑자기 마주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먼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개념의 세속화된 변형이 현대까지 살아남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 삶의 의미가 이미 만들어진 결정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그러면 우리에게서 혼란, 질투, 후회의 느낌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 시먼스는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동기와 성격Motivation and Personality》에서 한 말을 좋아하여, 변기 위에 써붙여놓기까지 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학적 성과다.
지금보다 더 위계적이었던 사회에서는 개인의 운명이 대체로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다. 성공과 실패가 나는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선언을 동반한 실력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능력주의적인, 또 사회적 이동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지위는 자신감, 상상력,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을 설득하는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출세를 할 가능성 때문에 금욕과 체념의 철학들은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시끄럽게 부추겨대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자신이 저급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겠다는 의지》 같은 제목이 붙은 책을 고자세로 경멸했다가 필생의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비관주의적 자부심 때문에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현대 교육 이론이 양육이라는 관념과 자존심 발달에 부여하는 무게는 우리 사회가 미쳤거나 약해졌다는 표시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강조는 현대의 노동하는 삶의 요구에 섬세하게 조율된 것이다. 고대의 위급한 시기에 금욕주의와 신체적 용맹을 가르친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이론이 나타나게 된 것은 친절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 필요 때문이다. 시대마다 등장한 여러 가지 아이 양욱 방법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적대적 환경에서 젊은이들에게 최적의 생존 가능성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찬란한 성취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서, 목표에 가까이 다가온 것은 맞지만 아직은 저편이 아니라 분명히 이편에 서 있으며, 사소하지만 핵심적인 여러 가지 심리적 결함(약간 지나친 낙관주의, 날 것 그대로 나타나는 반항심, 치명적인 인내심 부족이나 감상주의)으로 인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품이 없어 활주로 옆에서 꼼짝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트랙터나 자전거보다도 더 느린 존재가 되어버린 첨단 비행기와 같다.
천재들이 관측소나 작업장에서 일로매진하여 과학사의 방향을 바꾸던 시절은 지나갔다. 우리는 천체물리학자와 항공 엔지니어들이 어느 한 사람을 우리 시대의 갈릴레오로 띄우려는 미디어의 시도에 저항하면서 공동 실험실에서 작은 수수께끼를 10년 동안 함께 공략하는 소박한 시대에 들어섰다.
사실 여러 해의 노동의 결과를 사방의 벽에 걸어놓고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다. 우리의 모든 지능과 감수성을 한 장소에 모아둘 기회는 더군다나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물리적 상관물을 찾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하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집단적인 기획들 속에서 희석되고, 그러다 보면 작년에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진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우리가 어디로 간 것이고, 도대체 무엇이 된 것인지 궁금해하다가 결국 퇴직 기념 파티 같은 분위기에 젖어 우리의 사라진 에너지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한 부분을 자기 손으로 바꾸는 장인에게는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 보일런지.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루를 마치고 또는 한 생을 마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하나의 대상—그것이 네모난 캔버스든 의자든 도자기든—을 보며 그것이 그의 기술들의 안정된 저장소이고 그가 보낸 세월의 정확한 기록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손에 쥐거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무(無)로 증발해버린 기획들로 띄엄띄엄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군데 다 모여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을 깨우치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바람 없는 뜨거운 여름 오후 떡갈나무의 서늘한 그림자. 초가을 잎의 황금빛을 띤 갈색. 기차에서 스쳐가며 본, 묵직한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윤곽으로만 서 있는 헐벗은 나무의 어떤 금욕적 슬픔. 동시에 그림은 우리 정신의 잊고 있던 측면들과 신비하게 결합될 수 있다. 우리는 나무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갈망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하고, 여름 하늘의 아지랑이 색조에서 사춘기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물을 본 적 있어요?” 테일러가 묻는다. “제대로 본 적이 있냐는 거죠?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나는 또 우리의 전기 네트워크에 대한 무관심도 생각해보았다. 전기에 진짜로 고마움을 느낄 만한 사람들은 오래전, 1950년대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전구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노인에게 남아 있는 촛불에 대한 기억 때문이며, 전화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전서구(傳書鳩)*에 대한 기억 때문이며, 비행기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기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역사가 어떤 혁신이 도입된 시점만이 아니라 그것이 잊힌 시점, 너무 익숙해져서, 조약돌이나 구름처럼 평범해지고 딱히 눈에 띌 만한 구석이 없어져서 집단의식에서 사라져버린 시점을 확인하는 데도 유용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장촌과 철도를 보면서 그것들 때문에 풍경의 아름다움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이 읽은 책에서 그런 것들이 아직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
신문을 본다는 것은 소라고둥을 귀에 대고 인류의 고함에 압도당할 각오를 하는 것이다.
발광과 파국에 이른 것이 분명한 이 이야기들은 역설적으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런 것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제정신이고 복을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에서 고개를 돌리면서 우리의 예측 가능한 일상을 확인하고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욕망을 단단하게 묶어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하여 우리 동료를 독살하지 않고 친척을 앞마당에 묻지 않은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만나면 나누어주는 명함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가 우연적인 우주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질 덧없는 의식 한 조각이 아니라 ‘비즈니스 유닛 시니어 매니저’라고 말해준다. 아니, 좀 더 의미 있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동료들이 그 직책을 근거로 나에 관하여 가정하는 것들이 나를 제어해주는 덕분에 새벽의 외로움 속에서도 과거에는 가능했지만 이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니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물론 권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재구성되었을 뿐이다. 사장이 자신의 앞선 위치를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평직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부하 직원들은 그가 그들과 운명을 공유하는 척할 때 보여주는 신실함에 감탄하지만, 그는 속으로는 자신이 보통 사람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때에만 다시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사장은 또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권리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긴 인시아드*와 와튼** 졸업생들을 야단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게 남은 한 가지 도구는 설득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국 여러 곳에서 한 달에 서너 번씩 연단에 올라가 재킷을 벗고 앞에 모인 회계사 3천 명을 건너다보며 파워포인트 구호들을 배경 삼아, 그들이 존경할 만한 전문직업인이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낸 뒤에야 그들이 일하는 방법에서 개선할 점들을 교묘하게 제시할 수 있다. 마치 신앙이 쇠퇴하는 시대에 겸손하게 호소하는 설교자 같다.
창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단기 임대 사무소에 중고 책상을 갖다놓고, 로고와 명함으로 최소한의 허울만 갖춘 채 혼자 일을 하면서도, 우리의 생활과 운명을 바꾸려는 희망으로 매년 낯선 발명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정점에 오를 가능성은 400년 전에 프랑스에서 귀족이 될 가능성보다 아주 약간 더 클 뿐이다. 외려 귀족 시대는 그 가능성에 관해 솔직했고, 그런 면에서 더 친절했다. 옛날 사회는 포테이토칩에 미래를 한번 걸어보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을 무작정 강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평범한 삶은 실패한 삶과 똑같다는 식의 잔인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사업 계획안 2천 개 가운데 1950개는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50개는 꼼꼼히 살펴보고, 결국 10개에 투자를 한다. 5년이 지나면 그 가운데 네 기업이 파산을 하고, 다른 네 기업은 저이윤의 ‘묘지 순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빠지며, 겨우 두 개만 회사를 물에 떠 있게 해줄 만한 수익을 만들어낸다. 신청자의 99.9퍼센트가 반드시 실망할 수밖에 없는 성공 전망인 셈이다.
이 발명가들은 창업자 정신에 입각하여 아이디어들을 정리해내는 활동을 비전 있는 사람이나 하는 활동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있었다. 비록 벤처 캐피탈의 실용적인 언어로 자신의 노력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속 깊은 곳에서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한 번에 탈취제 자동판매기 기계 같은 것을 하나씩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그러니까 니체의 말처럼 아직 나 자신이 되지 못한 많은 수의 우리)는 혼자 있을 때면 우리가 해보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일을 그려보면서 스스로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에게 더 도취되어 있을 때면, 심지어 가게 처마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고, 새로운 서비스의 광고는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까지 꼼꼼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런 유쾌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백일몽은 우리 인격 가운데 한 측면,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부엌 한 구석에 식료품점을 차려놓고 기뻐하거나 정원에 판지 상자로 호텔을 짓고 만족하던 바로 그 측면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어떤 열망과 통찰에 창업이라는 형식을 부여하고 싶은 인간적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의 하찮음과 약함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너무 잘 알려져 있고, 너무 지루해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과제가 넓게 보면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확고한 결의와 진지함으로 그 과제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과장하고자 하는 충동은 지적인 오류이기는커녕 사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건강이 좋으면 우리는 모든 나라의 모든 인간 경험과 동일시를 하고, 머나먼 땅에서 벌어진 살인에 한숨을 쉬고, 우리 자신의 수명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은 경제적 성장과 기술적 진보를 바란다. 우리가 악당 세포 몇 개만 거치면 바로 종말에 이르는 존재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현재를 역사의 정점으로 보는 것, 코앞에 닥친 회의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묘지의 교훈을 태만히 하는 것, 가끔씩만 책을 읽는 것, 마감의 압박을 느끼는 것, 동료를 물려고 하는 것, “오전 11:00에서 오전 11:15까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이라고 적힌 회의 일정을 꾸역꾸역 소화해 나아가는 것, 부주의하고 탐욕스럽게 행동하다가 전투에서 산화해버리는 것—어쩌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활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현자들이 가르친 대로 죽음에 대비하는 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이다. 발트 해를 가로질러 펄프를 운반하거나, 참치 머리를 자르거나, 구역질 날 정도로 다양한 비스킷을 개발하거나,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전직을 권유하거나, 한 세대의 일본 여학생들을 매혹시킬 위성을 쏘거나, 들판에서 떡갈나무를 그리거나, 전선을 놓거나, 회계 처리를 하거나, 탈취제 자동판매기를 발명하거나, 항공사를 위해 강도가 높아진 코일 튜브를 만드는 동안 죽음이 우리를 기습한들 어떠랴. 죽음의 물결에 대항하여 성냥개비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을 때 우리를 발견한들 어떠랴.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