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 Author
    한병철
  • Published year
    2014
  • Category
    Philosophy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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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Highlights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투명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킨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정보로 전환된다. 오늘날처럼 비물질적인 생산 방식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증가가 곧 생산성의 증대와 가속화를 의미하게 된다. 반면 비밀스러운 것, 낯선 것, 다른 것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런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Peter Handke
사물은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오직 가격으로만 표현할 때 투명해진다. 돈은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물의 통약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완전히 철폐한다.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획일화를 표현하는 새 단어: 투명성.
오직 정보로만 이루어진 세계, 정보의 원활한 유통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불리는 세계는 기계와 유사할 것이다. 긍정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의 구조 속에 놓인 정보의 투명성과 외설성”이다. 투명성에 대한 강박은 인간마저 평준화하여 시스템의 기능적 요소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이다.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이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 오늘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정보의 더미 속에서 고차적인 판단 능력은 위축되어간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역시 부정성의 현상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결단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이야기로서 구별의 경계선을 만든다.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이론은 폭력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론의 사명은 “사물들이 서로 접촉하는 것을 막고” “뒤섞인 것을 다시 분리하”는 일이다.13 구별의 부정성이 없다면 사물들은 온통 제멋대로 증식하며 난교 상태에 빠질 것이다.
실증적positiv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가 이론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데이터의 비교가 이론적 모델을 대체할 것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부정성으로서의 이론은 실증적 데이터와 정보 이전에, 심지어 모델보다도 더 근원적인 지점에 놓여 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실증과학Positivwissenschaft은 임박한 이론의 종말을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일 뿐이다. 이론은 실증과학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증과학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결단의 부정성이 없다. 부정성으로서의 이론은 언제나 현실 자체를 현격히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 속에서 나타나게 한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제의라는 목적”에 사용되는 물건들은 “현존한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17 “제의가치”는 존재 여부에 달려 있을 뿐 전시와는 상관없다.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 제의적 물건을 보관하고 누구도 볼 수 없게 하는 관행은 제의가치를 더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그래서 어떤 마돈나 그림들은 일 년 내내 가려져 있다. 켈라Cella*에 있는 신상들을 볼 수 있는 권한이 사제에게만 있는 경우도 있다. 분리(secret, secretus), 구획, 폐쇄의 부정성은 제의가치의 본질적 구성 성분이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시의 강요는 “멂의 현상”으로서의 아우라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전시가치는 완성된 자본주의의 핵심이며, 마르크스가 제안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전시가치는 사용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사용가치가 아니고, 그렇다고 노동력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라서 교환가치라고 할 수도 없다. 전시가치는 오직 주의注意의 생산을 통해 발생한다.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전시Ausstellung는 곧 착취Ausbeutung다. 전시하라는 명령은 거주라는 것 자체를 소멸시킨다. 세계 자체가 전시 공간이 될 때 거주는 불가능해진다. 거주가 소멸한 자리는 주의자본注意資本을 증식하기 위한 광고로 대체된다. 본래 거주란 “만족한 상태, 평온해짐, 평온 속에 머무르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항상적인 전시와 성과의 압박은 거주의 평화를 위협한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물도 완전히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사물은 전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전히 제의가치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강제는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다.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전시가치의 절대화는 가시성의 폭정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심미화는 비심미적이다. 예컨대 ‘좋아요’와 같은 취미판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감상할 필요는 없다. 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복합성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늦춘다. 비심미적인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 그것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빠르다. 의미는 느리다. 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 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Horror vacui에서 생겨난다.
투명성은 아름다움의 매체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미는 가리는 것과 가려지는 것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베일도 아니고, 가려진 대상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베일 속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대상은 베일이 걷히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궁극적으로 베일을 본질로 하는 저 대상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즉 비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옮긴이)
바르트에 따르면 영화의 이미지들에는 푼크툼이 없다. 푼크툼은 사색적 머무름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나는 스크린 앞에서 눈을 감을 자유가 없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까의 이미지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푼크툼은 오직 머물러 있는 사색적 관찰 앞에서만 열린다.
음악은 오직 이미지에 대한 사색적 거리 속에서만 울려 나온다. 반면 눈과 이미지가 직접적인 접촉으로 연결되는 순간 음악은 그친다. 투명성에는 음악이 없다. 또한 사진은 “고요”해야 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고요를 향한 노력” 속에서 사진은 자신의 푼크툼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사색적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요의 장소이다.
만일 문화가 특별한 인물들, 표정과 몸짓, 이야기와 행위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시각의 포르노화는 탈문화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르트르에 따르면 몸은 단순한 살의 사실성으로 축소될 때 외설이 된다. 지시하는 것이 없는 몸, 방향이 없는 몸, 행동하지 않고 상황 속에 놓이지 않은 몸은 외설적이다. 과다하고 과잉된 몸의 운동은 외설적이다.
“운동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사라진다기보다는 속도와 가속화 속에서 사라진다. 운동은 운동보다 더 활발한 것 속에서 해체된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경험뿐만 아니라 인식도 부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보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모두가 모두를 가시성과 통제구역으로 몰아넣는다. 사적인 영역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전면적 감시 속에서 “투명한 사회”는 비인간적인 통제사회로 전락한다. 모두가 모두를 통제하는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에 타자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우리는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새롭게 프로그램되고 있다. 디지털 매체는 의식적인 결정 이전의 영역에서 우리의 행동 방식과 지각, 감정, 사고, 사회생활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고, 우리는 그 뒤를 쩔쩔매며 따라가는 중이다. 우리는 디지털 매체에 취해 있다. 하지만 이 도취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제대로 평가할 능력은 없다. 이러한 맹목과 마비가 오늘날 위기의 본질을 이룬다.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이미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감정 매체이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Masse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Masse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를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차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진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우리의 삶은 보편화된 상상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다. 미국을 생각해보라. 거기서는 모든 것이 이미지로 바뀐다. 이미지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이미지만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디지털 이미지, 디지털 매체는 이와는 다른 생의 형식과 결부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성장과 노화, 탄생과 죽음이 모두 지워져 있다. 영구적인 현존과 현재가 디지털 매체의 특징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피어나지도 광채를 발하지도 않는다. 피어남에는 시듦의 부정성이, 광채에는 그림자의 부정성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연장해야만 하는 벌거벗은 생명에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 디지털 시간은 포스트탄생, 포스트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한가로움은 노동이 완전히 중단된 곳에서 시작된다. 한가로움의 시간은 다른 시간이다.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변질시킨다. 일의 시간이 전부가 된다. 휴식Pause도 일의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국면Phase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일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 우리는 휴가 때뿐만이 아니라 잠 속에까지 일의 시간을 들고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도무지 편히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성과주체들은 마치 피가 안 통해서 꼼짝 못하게 된 다리처럼 그렇게 잠이 든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
이유만으로도 이미 일과 일이 아닌 것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다. 일터는 일하지 않는 공간과 확실히 떨어져 있었고, 일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일터로 가야만 했다.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경계는 완전히 철폐되었다. 디지털 기기는 노동 자체에 이동성을 부여한다. 모두가 일터를 몸에 지고 다닌다. 이동식 노동수용소를 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zählen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Erzählung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셈Zählen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타임라인도 삶의 역사 또는 전기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세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다. 디지털 시대에는 가산적인 것, 셈하기, 셀 수 있는 것이 전부가 된다. 심지어 애착과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것이 셀 수 있게 가공된다. 그래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지식은 정보처럼 밖에서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오랜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적 측면에서 지식은 매우 짧고 단기적인 정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또한 정보가 명시적이라면, 지식은 종종 함축적 형태를 취한다.
지각하는 것, 보는 것의 더 깊은 행복은 효율성의 부재에 있다. 사물을 착취하지 않고 그에 머물러 있는 오랜 시선에서 깊은 행복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우리는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카프카에게는 편지조차 이미 비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매체로 보였다. 편지는 영혼의 끔찍한 혼란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는 한 편지에서 밀레나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대체 어떻게 편지를 통해 사람들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일입니다.”
1996년에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 개념을 만들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IFS는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질병이었다. 오늘날은 모두가 IFS의 희생자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늘어나는 정보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사진은 다시 회화에 접근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디지털 사진은 하이퍼포토그래피로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제시한다. 실재는 그 속에서 오직 인용 혹은 파편으로서만 현존한다. 실재에서 따온 다양한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적인 것과 뒤섞인다. 이로써 하이퍼포토그래피는 지시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지시적인 하이퍼리얼 공간을 창출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아무것도 재현하지repräsentieren 않는다. 그것은 오직 제시할präsentieren 뿐이다.
투표소와 시장, 폴리스polis와 경제가 하나가 되어버린 디지털 광장에서 유권자는 소비자처럼 행동한다. 인터넷이 곧 투표소를 완전히 대체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때 선거와 쇼핑은 QUBE 시스템처럼 같은 화면에서, 즉 동일한 의식의 평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선거운동은 상업광고와 뒤섞일 것이다. 통치도 마케팅에 가까워진다. 정치에 관한 여론조사는 시장조사를 닮아간다. 유권자들의 분위기는 데이터 마이닝으로 탐색된다. 부정적인 흐름이 발견되면 곧 좀더 매력적인 새로운 상품이 투입되어 분위기를 바꾸어준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자일 뿐이다.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따라 자기를 밝힐 때,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알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것을 뻔뻔하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질 때, 즉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
『와이어드』지의 수석 편집위원인 크리스 앤더슨은 「이론의 종말The End of Theory」이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이론적 모델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병철은 모든 것이 겉이 되어가는 사회, 진리는 없고 정보만이 있는 사회, 낯선 타자와 직접 맞닥뜨릴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오직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만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나르시시즘적 사회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