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과 울림: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 Author
    김상욱
  • Published year
    2018
  • Category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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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Highlights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이 선험적으로 갖는 인지구조라고 보았다. 우주가 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의 탐험이 끝나는 때는 우리가 시작한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순간이다.
T. S. Eliot
생명은 진화를 거듭하여 호모사피엔스에 이르렀고, 호모사피엔스는 이제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묻고 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잉크가 점차 퍼져서 물에 고르게 섞인다. 밀도는 자발적으로 균일해지려 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 설명된다.
돌이켜보라. 역사는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불리한 여성의 지위를 이용하여 착취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뇌는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들로 구성된다. 뉴런은 신호를 전기적으로 전달하는데, 보통 수천 개의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 사이의 연결 부위는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결의 세기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연결 부위가 갖는 세기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진화에는 의도가 없다. 주사위 던지듯이 무작위로 모든 가능성이 펼쳐진다. 검은색 나방도 나오고 흰색 나방도 나온다. 세상이 밝을 때는 흰색 나방만 살아남는다. 흰 바탕에 검은 나방은 포식자인 새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검은색 나방이 살아남는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인간과 같이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마저 나올 수 있다.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왜 특정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주사위를 던져 왜 하필 ‘1’이 나왔냐고 묻는 거랑 비슷하다. ‘1’은 가능한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진화는 우연히 일어난다. 우연으로 선택된 수많은 사건의 연쇄에 의미를, 아니 더 나아가 의도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우연은 필연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 법한 상태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 부른다. 이 과정을 정량적으로 표현하면 “엔트로피는 증가할 뿐이다”가 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진행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 카오스가 일어나고 있으며, 지수함수적으로 빠르게 초기조건에 대한 정보가 사라진다. 그래서 엔트로피는 무지의 척도다. 통계적 상태에 도달하면 초기조건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 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잉크가 퍼져서 물 전체가 뿌옇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놓아둔 뿌연 물이 맑은 물과 잉크 한 방울로 스스로 분리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잉크가 한곳에 방울로 모여 있는 것보다 퍼져 있는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즉, 잉크가 퍼져가는 과정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인 것이다.
빛이 입자라고 처음으로 용감하게 외친 사람은 당시 특허청 말단 직원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이었다.
『성경』의 여호수아 10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는 장면이 나온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돌아야 가능한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지동설의 비극이었다. 중세유럽에서 『성경』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동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고문을 받거나 화형을 당해야 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야말로 일종의 상전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상전이가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상전이를 경계로 이전과 이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전이는 이후의 세상이 갖는 특성을 결정짓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상전이의 결과물이다. 우리 모두가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미국이 초강대국인 이유, 우리가 분단된 이유 등은 모두 이 상전이의 결과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한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특별한 이유다. 심지어 과학자는 아는 것조차 분명하게 ‘예/아니요’로 말하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일반인에게 과학이 불확실하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불확실성과 확률을 현명하게 다루어 확실성을 얻는 방법이다.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류가 만든 어떤 과학이론보다 정확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
실험실에 갓 들어온 대학원생들은 날마다 노벨상 받을 만한 결과를 발견한다. 호들갑 떠는 신참의 말에 선배는 심드렁하게 이것저것 확인할 리스트를 말해주기 마련이다. 그의 노벨상은 곧 물거품이 된다. 근대철학을 연 것도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 충분한 의심을 통과한 과학이론에만 법칙이라는 신뢰가 주어진다.
합리적 의심을 하는 사람이 비난받는 사회는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다.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 불확실한 전망을 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