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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벌어지는 최악의 착취는 '문화적 착취' 즉,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의 강렬한 문화적 욕구를 놓고 일어나는 파렴치한 상업적 착취다.
포괄적 관점을 취해 보면, 디자인 작업을 세 범주로 편리하게 나눌 수 있다.
공업 디자인 (사물), 환경 디자인 (장소), 의사소통 디자인 (메시지). 물론 이 범주들은 결코 절대적이지도 않고, 항상 그 같은 명칭으로 불리지도 않는다. 이 분류법은 보다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출발점으로는 쓸만하다.
미적이고 감각적인 자유가 더 많이 허용되는 디자인 기회일수록 '순수 미술'에 가까워진다. 허용치가 작을수록 디자인은 과학에 가까워지고, 그 경우 미적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진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제 분야에서 영원히 겸손한 학생이어야 한다.
보조금, 연구비, 결국은 알량한 교직에 매달려 줄 서는 '평생 학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한편, 분야를 '읽고', 이론이나 비평에 뚜렷이 기여하는 진지한 학구파 학생도 그들과 구별해야 한다. 결국, 내가 말하는 '학생'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는 사람을 뜻한다.
디자인 작업의 10퍼센트가 영감에 의존하다면 나머지 90퍼센트는 대단히 고단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언제나 지침을 분명히 이해하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최선으로 활용하려면, 어느 정도 정리된 절차가 필요하다.
"애정, 노동, 지식은 삶의 원천이다. 또한 그들이 삶을 지배해야 한다"
Wilhelm Reich
디자인 능력은 기술, 지식, 이해, 상상의 결합에서 나오고, 경험을 통해 단단해진다.
이해 없이 남용된 지식이 입히는 손상은 측정하기 어렵다. 지식은 교과서에 실린 모범 사례들이 내놓는 관습적인 해결책의 누더기처럼 공허할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디자인 교육은 반드시 표면 아래를 파헤쳐야 하고, 처음부터 성과의 도출보다는 의도를 밝히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배움과 이해는 삶의 연속성에 뿌리를 둔다고 보는 것이 현명하다면, 정말로 유용한 초기 교육은 이후의 경험 속에서, 몇 년 후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발할지도 모른다. 거꾸로,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는 교육은 허황된 성취감은 선사할지 몰라도 정작 지속적 성장에 필요한 토대를 마련해 주는 일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
이는 까다로운 문제인데,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강압적인 성과 지향적 분위기 속에서는, 당연히 학생도 되도록 빨리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허울만 그럴듯하고 얄팍하다 해도, 디자인 과제에서 나오는 고도의 성과물과 그것이 선사하는 거의 자로 잴 수 있을 듯한 성취도를 대신하기에, 이해도의 성장과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는 너무 빈약해 보일 것이다.
모든 디자인 결과물에는 추상에 실질을 더해주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빠지기 마련이다. 바로 실현과 사용이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잊지 말고 상기해야 하는 완고한 실체다.
디자이너라면 디자인을 하는 (그리고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 조건처럼 끼어드는 소유관계를 의식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하면 갑자기 좋은 디자인을 하기가 마술처럼 쉬워질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세상만을 꿈꾸며 디자인하기를 멈추는 디자이너는 아마 결국 아무것도 디자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디자이너가 누리는 자유는 그가 속한 사회의 가치를 크게 반영한다. 디자이너에게는 문화의 조건들에서 도망칠 특권은 없어도, 그에 대해 무엇이든 할 특권은 있다.
1920-30년대에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활동했던 그래픽 디자이너 파울 스하위테마의 글
'우리 작업은 예술이 아니었다. 우리 작업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낭만적 통찰들이 거짓임을 알았다. 온 세상이 문체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새 출발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우리의 연구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새로운 통찰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그들이 지닌 소통의 힘을 찾자는 것이었다. 허식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쇼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령 의자나 탁자를 만드는 경우라면, 나무, 금속, 가죽 등의 구조적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에서 출발했다. 의자, 거실, 주택, 도시의 진정한 기능 즉, 사회적 조직을 다루기 위해서였다. 인간적 기능들이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목수, 건축가, 인쇄업자, 제조업자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혼돈을 질서로 환원시키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만사를 해명하고,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사회 운동이었지, 유행이나 특정 사조가 아니었다. 우리는 작업을 통해 사회적 상황과 결합하려 했다... 문제에 대한 답은 질문의 형태를 취했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무엇을 통해?'
당신 자신이 보기에 '좋은' 디자인이란, 교육 받은 디자이너의 기준에서 모든 제약을 만족시키며 훌륭히 실현된 의자의 형태로 규정해야 하는데, 그 제약에는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도 디자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토속성이 뜻대로 동원할 수 있는 조형 양식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토속성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으로서, 쉽게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토속적 형태에 대한 연구는 단지 철학적인 위안이 아니라, 정신과 감각의 기쁨을 위한 토대다. 아무리 디자인이 훌륭해도, 새로 지은 사무실 블록에는 그런 자산이 없다.
원점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나름대로 영감의 원천을 정하고, 좇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디자이너의 시각은 "사물 안면의 표면"에 길들 뿐이다.
작업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만 보고, 생각이 같은 전문가들하고만 작업하는 디자이너도 썩 좋은 작품을 만들거나 디자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 작품은 사용의 맥락에서 연관성, "적당한 무게", 타당성을 잃게 된다. 한마디로 그런 작품은 자기 충족적 성향을 띄게 된다.
의자의 형태가 해부학적으로 지나치게 충실하면, 앉은 사람이 없을 때(즉, 대부분의 시간에) 그 의자는 거슬릴 정도로 비어 보이기 마련이다.
정규 교육 체계의 일반적 속성을 고려할 때, 일부 대학에 만연해 있고, 때로는 이해력보다 더 열성적으로 평가 위원이나 검정 기관 등의 지지를 받는, 일반적이고 비속한 신앙 하나를 지적해 둘 만하다. 바로 모든 디자인의 결정은 본질적으로 "신선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작업은 반드시 "거칠어야"한다는 (넓은 영역에 걸친 고민의 흔적이 드러나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런 관점은 부분적으로 중등 교육에서 당연시 되는 경쟁 원리가 물려준 유산으로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고등 교육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 사고는 교육과 "현실 세계'의 심각한 불일치 즉, 학위 취득의 투사적 이미지와 디자인 실천의 조건을 혼동하는 경향과도 관련이 깊다.
자전거라는 기계는 일정한 범위에 수행 조건에 걸쳐 훌륭히 검증되고 개발된 전형이다. 대단히 효율적인 에너지 변환 장치이자, 의문의 여지 없이 엄청난 인간적 노고를 통해 현재의 형태로 다듬어진 협업의 산물이다. 그런데 제일 원리로 돌아가 처음부터 자전거를 다시 디자인해야 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표준형 디자인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새로운 사용 조건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아마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현대 운동은 언제나 보잘것없고 부적절한 경쟁적 독창성을 반대했다.
최악의 오류는 실질적인 면에 전념하지 않고 '방법론'이나 '프로세스'같은 개념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는, 문제 분석에 활용했다는 허울 좋은 과학적 방법을 내세워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태만에서 비롯한다.
레더비의 육십 회 생일을 기념해 센트럴 미술 공예 대학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그가 말한 '인생에 대해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인생은 봉사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2. 봉사는 별것이 아니라 보통의 생산 노동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3. 노동을 이해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노동을 예술로 보는 것이다... 노동을 환영함으로써, 또 예술로 봄으로써, 노동의 노예적 성질은 기쁨으로 바뀐다.
4. 예술은 바르고 성실한 보통의 노동으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그렇게 보면, 예술은 가장 폭넓고, 좋고, 필요한 문화 형식이 된다.
5. 문화는 비단 독서로 쌓은 교양만이 아니라, 조절된 인간 정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양치기, 선장, 또는 목수는 학자와 다른 문화를 향유하지만, 그들의 문화 역시 참된 문화다.
"진정한 예술가란, (유럽에서 제율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인) 글래스고 미술 대학의 매킨토시처럼, 가차없는 현대적 조건들 속에서 효과를 거두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콘크리트가 콘크리트답고, 강철이 강철다운 건물은 없기 때문이다."
Norman Bel Geddes
정신적 역동성을 결여하고, 동양과 서양의 좋은 점은 다 원하면서 어느 쪽의 불편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사회에서는, 예쁘장한 모순들이 많이 꽃피고, 실제로 절묘하게 배양되기도 한다.
"진실을 사랑하기보다는 위선을 증오하기가 더 쉽고 흔하다."
Robert Graves
미래에 관해 학생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자신에게 어떤 요구가 주어질지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가능성에 대한 대강의 윤곽은 그려 볼 수 있지만, 창조적 도전의 정확하고 구체적인 속성은 닥쳐 보아야 아는 것이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에서 판단력의 토대가, 아니 오히려 의사 결정의 구조 자체가, 사이비 프로페셔널리즘이나 학위와 같은 신비의 열쇠가 아니라 평범한 삶과 인간적 고민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식하면, 초보자도 숙련된 디자이너와 같은 바탕에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다.
디자인은 가치의 영역임과 동시에 아찔할 정도로 구체적인 의사 결정의 영역이며, 그런 의사 결정의 많은 부분은 극히 기술적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정량화가 가능하고, 보통 그것만 해도 전문가의 임무를 다했다 칠 만하다. 의미보다는 정돈된 증거에 연관된 함수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디자인은 엄밀히 말해 문화적인 선택이다. 언제나 그랬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고, 재치를 가다듬고, 최소한 나름대로 명철한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사실의 세계에서 가치가 갖는 자리"에 있지만, 우리를 기다려 주는 역할 따위는 없고, 오직 스스로의 인식에 기초해 용기를 내 제 역할을 창출할 기회만 있을 뿐이다.
그래픽이란 (리처드 홀리스의 정의를 요약하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만든 표시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디자인 드로잉에 필요한 기술적 '재능'은 생각의 요지를 종이에 옮기는 능력 정도에 불과하다. 디자이너는 스케치, 다이어그램, 단면도, 실물 크기 세부도를 통해 생각하고 말한다.
드로잉은 메시지와 기록에 불과하기에, 의도한 바를 오해의 여지 없이 충분히 전달해야 한다. 실용적이어야 할 드로잉의 순결한 외관을 놓고 고민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객관적 절차에 따라 실태만 파악하면 될 듯한 지극히 단순한 측정과 기록에서조차, 우리 인간은 편파적인 시각과 신뢰하기 어려운 기억력을 동원해 갖은 창작을 하곤 한다.
대부분의 디자인 문제는 산만하고 부정확하게, 심지어 오해와 함께 제시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해결이 불가능하다. '문제'에 따라서는 그런 발견이 즉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 지극히 개방적인 상황에서는 디자이너 자신이 문제를 창안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문제'라는 용어를 쓰거나 디자인은 문제 해결로 이해하는 태도는 별 도움이 못 된다. 그와 는 종류가 다른 자원과 전략이 필요하다.
쓸 만한 연장으로 의도된 책은 부담스러운 전례를 너무 많이 싣지 말아야 한다.